장옥정 장희빈묘 고양시 서오릉 다녀오다
신선한 시선? 새로운 도전을 뜻했던 장옥정 이야기 였는데, 원작도서를 읽어보면, 더없이 안타깝게 그려진 장옥정의 이야기 였기에, 꼭 가봐야겠다. 싶더군요. 너무 드라마에 심취해 있기도 하고요. 매회 보면서 생각하는 것인데, 숙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장희빈, 오직 희빈을 위한 전각을 지어주고, 당호 까지 붙여주고, 빈의 자리 까지 올라갔던, 또한 수년간 아들 복 없다가 경종까지 탄생시킨 희빈에게 직접 사약을 내리게 되었던 것일까? 의구심이 들면서, 누구의 말이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제 나름의 상상 속에는, 숙종은 누구보다 왕권강화를 외쳤던 왕이기에, 그 왕권을 경종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또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잡기위해서,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지만, 장옥정 장희빈 묘 (대빈묘)를 보면서, 숙종에 대한 배신감마져 느껴지더군요. 왕권이 몰락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팽겨쳐질 만큼 이였을까? 그리고, 어찌했던 사랑했던 여인이자,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었고, 또한 경종의 어미 인데도..
능 아닌, 묘 라는 것 자체도 충격이였는데, 서오릉에서 보고온 대빈묘는 참 3족 멸하는 정도의 비참함을 보여줬답니다. 1969년 광주 야산에서 도로를 내다가 발견했다는데, 얼마나 관리가 안되었고, 또한 버려졌던 이름 모를 묘였지 않을까 싶어요. 경국지색이라말이 실록에 담길만큼 희대의 여인인데 말이죠.
위의 사진은, 버스정류장에서 서오릉까지 가는길, 그리고, 서오릉에서 서울쪽으로 내려가는 버스는 타는 장소 입니다. 내려서 5분정도 걸어야 하고, 타러갈때는 10분 정도 걸어내려가야 하더군요. 자동차로 가면, 손쉽게 도착 하지만, 버스로 가는길이 참 예쁘다길래 3시간을 투자했답니다. ^^
그런데, .. 명릉이 따로이 위치해있더라고요. 관리실 마져 따로있는. 덕분에, 명릉만 못보고 왔답니다. 명릉 부터 보는 것이 추천 코스였는데, 대빈묘를 우선으로 보다가, 추천코스를 망쳐버린 것이죠. 문닫는시간 30~40분 전부터 입장 불가;;
홍전문(紅箭門)의 붉은색은 악귀를 내쫓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화살 '전(箭)' 자를 '살'로 발음하며 오늘날 '홍살문'이 라고 전해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대빈묘 에는 홍살문이 없습니다.)
경릉을 보는데, 어르신분들이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길로 지나가시더라고요. 신도(좌), 어도(우) 라고 하는데, 신도로 들어갔다가, 어도로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집에와 검색해보니, 신도는 신령이 다니는 길이고, 어도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고 합니다. 저는 신도로 다녔는데 ㅠㅠ;;
경릉 보고, 대빈묘로 가는길 모습입니다. 정~말! 피톤치드? 산림욕! 공기가 그렇게 좋을수 없더라고요. 왜이렇게 주민분들이 많이들 걷고 있나 싶었는데, 이 길에 들어서자마자, 계속 걷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좋더라고요. 게다가, 나무들이 너무 잘생기고 예쁜! 뚝뚝 갈라진 나무결이 힘줄 같고, 근육 같아보였다랄까요? 또 가고 싶을정도로 나무길이 너무 좋더라고요.
사진을 작게해서 올릴까 했는데, 줄이니까.. 너무 초라해보여서, 사진크기로 나마.. ^^
장옥정 장희빈 묘 (대빈묘) 모습 입니다. 나무길 중간쯤에서 불쑥 보이게 되는 대빈묘 인데요. 서오능 방문전 미리 알아봤을때, <대빈묘는 늘 음지에 있다, 기운이 이상하다> 등등의 글이 있어서, '그럴까?' 싶었는데, 해지고, 해뜰때마다 다르겠지요. 하지만, 볕좋은 오후 2시 30분 이였지만, 제 기분인지, 왠지 음지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알고있는 상식선에서, 그리고, 드라마에 빠져있는 저에게는 무척 안타깝게 보여져서 그런걸지도 모르지만요.
희빈(禧嬪) 장씨
능호 : 대빈묘
위치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조성시기 : 1701년(숙종 27)
능의구성
대빈묘는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이다. 곡담이 봉분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 봉분 앞쪽으로는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양 옆으로는 문석인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능의역사
희빈 장씨가 1701년(숙종 27) 10월 10일,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한 죄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지냈는데, 1969년 현재의 서오릉 지구로 옮겼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희빈(禧嬪) 장씨
생몰년도 : ? ~ 1701년
생애이야기
희빈 장씨는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경종의 어머니이다. 어린 시절 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이 되었으며, 1688년(숙종 14) 왕자 윤(훗날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1694년(숙종 20) 서인들의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숙종 27)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아 사약을 받았다.
직접 왕이 쓰는 일기가 있었더라면면, 그건 정확했을텐데 말이죠. 자신의 일기장은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있었더라도..일제시대때 다 불타버렸을지도..
산쪽으로 올라가서 돌을 직접 찍어보신 다음블로거가 있었는데, 다시 검색해보니 못찾겠네요. 아무튼, 돌 뒤로 나무 자라났던 것이지, 돌을 뚫고 올라오것이 아님을 사진으로 보여줬었답니다. 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참하긴 했던 것 같아요. 직접 산위로 올라가서, 바위 뒤쪽을 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상으로 봐도, 정말 그럴듯한 모습의 돌과 나무 이랍니다.
아무튼, 광주에서 왜 서오릉 까지 올라와서, 이런자리에 묘이장이 되었을까 싶기도 하고..
장옥정 장희빈 묘 (대빈묘)에 대한 소문이 있더라고요.
1. 묘 앞에서, 108배를 하면, 남자가 생긴다. (이유야, 장희빈의 기를 받아서 남자를 꼬실수 있다)
2. 불임인 부부가 묘에서 108배 절을 하면, 아이가 생긴다. (이유야, 장희빈의 기...)
이런 류의 정말, 말도 안되는 소문이 있다고 합니다. 1969년에 묘이장을 해서 옮겨왔는데, 그 기운이 아직도 있을까 싶기도 하고, 또 기운 있다해도, 받아주실까 싶기도 합니다. 관람예절이나 잘지켰으면 하는데 말이죠. 아저씨들이 너무 막 넘어가셔서 사진찍으시던, 하지만, 이내 바로 나오시는 ㅋ (미신일지라도 무섭다며)
홍릉과 창릉을 보러 가는길, 하수가 참 예쁘더라고요. 나무로 하수구 뚜껑이 만들어져 있는게 신기했거든요. ^^
앞서, 경릉에서 봤던 모습과 또다른 홍릉 인데요. 참도는 그대로였지만, 새로이 참도길을 만든 것 같더라고요. 중간부터 옛돌이 나왔기 때문 입니다. 돌을 밟는 순간, 찡~한 기운이 느껴졌답니다. 왠지, 왕이 어도로 걸어갈때, 매우 천천히 걷지 않았을까 싶을정도 랄까요? 돌이 울퉁불퉁 한데, 걸음걸이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하라는 뜻이 놓여져 있는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보통 왕이 걸어가는길이 평탄하겠금 할텐데, 너무 울퉁불퉁한 돌들로 되어있었거든요.
새로만든 돌은, 평평함 그자체.
1721년(경종 1) 왕위에 오른 연잉군의 형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는데, 이와 동시에 정성왕후도 세제빈으로 봉해졌다.1724년(경종 4) 경종이 승하함에 따라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다.
홍릉은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능지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왕비 능의 오른쪽에 자리를 비워두고 쌍릉 형식으로 조영하였다. 능 위의 석물도 훗날 자신의 능과 함께 조성될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배치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능은 정순왕후와 함께 동구릉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곳은 현재 빈 터로 석물만 쌍릉 양식으로 남아 있다.
쌍릉으로 만들어졌으나, 영조의 능은 정순왕후와 함께...
가장 독특한 양식을 보여준 창릉 입니다. 서오릉에서 가장 오래 터를 잡았기 때문인지, 정자각 자체에서 세월이 느껴지더군요. 다른 곳과 달리, 참도의 끝도 다르고, 올라가는 계단도 다르더라고요. 내부 구조(?) 기둥의 모양이라던지 여러부분이 한눈에 봐도 많이 달랐답니다. 서오릉에서 기분 묘~하게 만든 능 중에 하나 입니다. 밝은 귀신의 집? 정자각. 하지만, 능을 바라보면, 오래된 도깨비신이 능을 지키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길~~~게 뻗어진 참도(신도,어도)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두창으로 돌아가신 인경왕후의 능 입니다. 익릉 이라 하더군요. 드라마 속에서의 안타까운 만큼, 실제 역사 속에서 참 아프게 생을 마감하셨다고 하는데요. 정략결혼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오랜시간 숙종의 곁에서 벗이 되었던 세자빈 이였고, 왕비가 된 인경왕후 라고 합니다.
서인정권의 힘일까? 아니면, 숙종의 슬픔이 이 길을 만든걸까? 이런 생각하며, 길을 걷게되더군요. 서오릉 에서 본 능 중에 최고라고 말씀드릴수 있는 '익릉' 입니다. 3분 걸어서 홍살문을 지나고, 참도는 신도, 어도, 그리고, 변로(신하가 걷는길) 까지 있었답니다.
무엇보다, 창릉에서 받은 느낌과 다르게, 양쪽으로 둘러싼 나무숲이 익릉으로 향하는 길을 무섭도록 지켜주는 느낌을 줬답니다. 둘러보다보니, 나무가 익릉 방향으로 고개가 숙여져 있더군요. 신하들이 고개를 숙이듯이 말이죠. 물론, 바람에 의해서 그리됐겠지만, 장관이였습니다.
모든 능과 대빈묘를 보고 나올때, 묵념을 했는데, 인경왕후가 모셔져있는 익릉에서는 가장 오랜시간 묵념을 했답니다. 대빈묘 와는 다른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1680년(숙종 6) 10월 26일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현재의 위치에 능호를 익릉이라 하여 조영하였다. 숙종 연간에는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이전에 조영된 능이므로 기본적으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인물 이야기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머지않아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 이후 당파 싸움과 맞물려 숙종을 둘러싼 궁중여인들의 암투가 구중궁궐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 『사씨남정기』이다. 사씨남정기의 저자는 당대 내로라하는 벼슬길에 오르다 남인의 탄핵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김만중이다. 관료이자 학자였던 그는 바로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김만중은 유배 생활 중에 『사씨남정기』이외에도 여러 편의 글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일대기를 그린 『윤부인 행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는 인경왕후가 어렸던 시절, 친할머니인 윤씨 부인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그 행실을 반듯하게 가르친 덕에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주선하고 응대하는 것이 어른 같아 궁중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직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끝나지 않았지만, 숙종과의 로맨이야기는 참 새로운 시선이지 않나 싶습니다. 내쳐지고, 버려지고, 사사 당하기 까지 하는 그 과정을 몹시 궁금한데요. 어떤 이야기로 풀어서 마음아프게 만들지 참!
배우들, 스탭들 도 서오릉은 한번 방문하면 좋겠다~ 싶네요. 고양시에서 한번 자리잡아도 참 좋을텐데 말이죠.
아무튼, 서오릉에 있는 장옥정 장희빈 묘 (대빈묘)의 모습을 소개해보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방문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참고로 도시락 꼭 챙겨서 가시면 더 좋을 듯 합니다. 근처 식당들이 죄다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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